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천·재령군 봉기 (문단 편집) == 사건 전개 == 전쟁 전부터 황해도 신천군에서는 [[김일성]] 일가와 [[소련군]]과 함께 비밀리에 연대한 [[반국가단체]]들이 저질렀던 사상 검열, 학살, 이외에도 각종 갖은 박해와 재산강탈 및 문화재 반출, [[소련군정]]의 지원 아래 김일성 세력이 일방적으로 실시한 [[토지개혁]] 여파로 인한 재산 강탈과 그에 저항하는 갈등, [[기독교]] 탄압, 예비검속 등에 맞서 저항하여 대한광복회·반적대(反赤隊)·반공구국동지회·구국기독동맹 등이 조직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하였다. 북한의 남침 이후 북한당국의 감시를 받던 전 민주당원·반공적인 학생들이 북한군의 징병을 피해 [[구월산]]으로 도피하였다가 1950년 7월 중순 반공단체의 대표들이 모임을 갖고 '광복회' 혹은 '구월산반공유격대'[* 구국동지회 내에 유격대를 편성했다.(조동환, '항공의 불꽃', 보문각, 1957, 89-97면)]를 결성하였으며 입산하지 않는 학생들도 각 면, 읍내 학교와 단체를 포섭하였다. 이들은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의 참전 사실을 알고 [[대한민국]]의 승리를 확신하면서 서로 연락체제를 갖추고 지하 조직을 강화하여 전단살포·총기 탈취·경비 초소 습격 등을 진행했다. 특히 1950년 10월 9일 [[사리원]]에서 [[해주]] 방면으로 가는 무기수송 트럭이 재령을 통과하게 된다는 정보를 입수한 재령의 권영화는 홀로 북한군 트럭을 급습하여 소련제 장총(아시바 소총) 19상자 214정을 노획하였다. 이후 신천광복회의 김순겸·호순겸이 북한군 복장으로 가장하고 재령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재령의 권영화·김화경·정자환과 접촉해 소총 10상자 114정을 이관받았다. 유엔군이 해주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10월 12일 대원들은 무장봉기를 위해 총지휘관 신상규[* 국무총리를 지낸 [[백두진]]의 친척이라고 한다.]·구월산유격대 김옥·북부대 홍태환 등을 조직별 책임자로 결성하고 14일 신천과 재령에서 동시에 거사를 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나 10월 13일 낮에 안악과 재령에서 봉기에 대비해 총기를 분배하던 도중 인민군에 적발되어 일찍 봉기를 일으켰다가 후퇴하던 인민군에게 진압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당했던 것보다 가혹한 예비검속을 우려한 신천의 반공 세력은 10월 13일 오후 6시부터 산발적으로 저항을 시작하였고 이어서 오후 9시에 본격적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재령에서 후퇴한 반공 인사들이 합세한 신천무장대는 그날 밤과 익일 새벽 내내 치열한 전투를 펼쳤는데 그 과정에서 신천서부교회의 김익두 목사와 신도들이 인민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동시에 무장대는 신천내무서를 공격했다. 공산군의 저항이 강해서 이튿날까지 전투가 계속되었고 14일 정오 무렵 내무서를 완전 점령했으며 맥주병으로 만든 [[화염병]]을 내무서에 투척하여 전소시켰다. 내무서원들이 도망가자 감옥에 억류되어 있는 반공청년 80명을 석방시켰다. 그러나 이틀 동안 적들에 의해 살해된 수많은 시체를 발견했다. 산천여고, 정치보위부 지하실, 군당방공호 등에서 발굴된 시체는 1,000여구가 넘었다.[* 조동환, 항공의 불꽃, 369-371면] 반공무장대원들은 이에 흥분하여 마을에서 공산주의자를 찾아내 사살했다. 민간에 대한 가택수색과 거리검문 등으로 많은 주민들이 연행당했던 신천 시가지에서 남산에 대형 태극기가 게양되면서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는 속에 무장한 의거대원 3명이 3개 대로 나누어 시가지로 돌격해 왔다. 의거대는 검찰청·내무서·인민위원회·정치보위부 등을 점령한 다음 문화극장의 유선방송을 통해 의거대가 시가지로 진입한 것을 시민들에게 알렸다. 각 면에서도 동시에 봉기하여 내무서 분주소와 면 인민위원회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공산당 군당본부과 온천면으로 집결한 내무서원과 공산당원들이 의거대를 공격해 왔고 해주로부터 22대의 트럭을 타고 반격해 왔다. 마침 이 때 아군 전투기 4대가 적측에 기총사격을 가해 승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치열한 시가전 끝에 의거대는 일제히 반격작전을 전개하여 10월 17일 적을 물리치고 18일 저녁에 입성한 유엔군에게 봉기 기간 활동사항을 보고하였다. 의거대가 승기를 잡으면서 [[조선로동당]] 간부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이 가해졌는데 10월 14일, 신천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 처형된 것을 시작으로 황해도 인민위원장 리용진도 잡혀서 발가벗겨진 채로 가슴에 직위, 등에 이름이 쓰인 채로 [[조리돌림]]을 당한 후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한 10.13 만세운동 주동자 김봉선의 아들이 신천읍 민청사무실 전선대에 리용진을 묶은 후에 총을 쏘아 죽였다. 한편 유엔군의 북진을 피해서 인민군과 로동당,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피난길에 올랐는데 신천군에서 봉기가 일어난 줄 모르고 신천군에 온 이들은 모조리 잡혀서 인민군은 무장해제 후에 모조리 총살당했고 노동당원들은 휘발유를 끼얹은 후에 군당 방공호에 몰아넣고 남녀 가리지 않고 산 채로 태워 죽였다. 이후 노동당원의 가족들까지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으며 과거 노동당에 협력했거나 노동당원이었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지인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는 등 아비규환의 살육극으로 치달았다. 의거대를 경찰대(대장 김장성)로 조직하여 치안유지를 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자 신천 무장치안대는 향토 사수를 다짐하고 구월산에 잠복해 있다가 하산하는 북한군 공비와 항쟁을 벌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와 유엔군이 후퇴하자 12월 7일 신천무장대도 군민들과 함께 해주 방면으로 후퇴하였다. 후퇴하기 직전 신천무장대는 그동안 좌익으로 의심되었던 이들을 마지막으로 학살하고 떠났다. 해주에 당도한 신천무장대와 군민들은 해로를 통해 월남을 시도하였으나 국군이 신천 주민들의 해주 진입을 막으면서 무산되었다. 신천에 아직 중공군이 진입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신천무장대는 다시 신천으로 북상하여 12월 19일 안악의거대와 협동해 신천을 탈환하였다. 이후 재령 방면에서 공격해 온 북한군과 맞서 신천읍을 세 차례나 빼앗기고 빼앗았다. 신천무장대는 향토 사수를 결의하고 잔류하기로 결정했으나 구월산으로 숨었던 북한군 패잔병들이 신천읍을 거듭 공격하여 무장대원들이 이를 방어하는 데 한계에 도달하고 피해가 누적되자 본대는 1950년 12월 21일 옹진을 통해 인근 섬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신천군 북부면·노원면, 산천면·용문면·용진면·두라면 등 면 단위 무장치안대는 철수를 거부하고 구월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각 면 단위로 활동하고 있는 무장대를 하나의 조직체로 결속시키기 위해 구월산을 중심으로 한 구월산전투사령부와 신천군 남부지역에 있는 두라산을 근거로 한 두라산전투사령부를 각각 창설하였다. 구월산전투사령부는 무장대원 800명과 비무장대원 400여 명이 있었고 두라전투사령부는 무장병력이 400명에 비무장 대원 300명으로 이루어졌다. 전투사령부는 산악지대에 구축한 공작 비밀 아지트를 근거지로 하여 정보수집, 애국반공인사 구출, 교란작전을 수행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